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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가 된 땀THE BLOODY SWEAT by Dr. R. L. Hymers, Jr. 이 설교는 2018년 2월 18일 주일 저녁,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더라” (누가복음 22:44). |
이 설교는 위대한 C. H. 스펄전의 두 설교에, “뜰에서의 고난” (1874년 10월 18일), “겟세마네” (1863년 2월 8일), 기초를 두고 있습니다. 저는 설교의 대가가 했던 설교학적으로도 위대한 두 편의 설교를 개괄적으로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이 곳에 원본은 없습니다. 저는 이 설교들을 문학적 지식이 적은 현대 사람들을 위해 단순하게 바꾸어왔습니다. 이 생각들은 위대한 설교가의 설교들을 통해 얻은 것인데, 저는 스펄전이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예수를 그려낸 이 설교가 여러분의 영혼을 붙잡고, 당신의 영원한 운명을 바꾸길 소망하는 마음으로 이 설교들을 여러분께 소개합니다.
예수는 제자들과 유월절 만찬을 드시고, 자신의 고난을 기념하셨습니다. 그리고는 그들과 함께 겟세마네 동산으로 가셨습니다. 왜 예수는 자신의 고난의 시작을 겟세마네로 택하셨을까요? 그 이유는 아담이 에덴동산에서 죄를 우리에게 남겼기에, 마지막 아담인 예수도 또 다른 동산인 겟세마네에서 우리를 회복하길 원했기 때문이었을까요?
예수는 기도하기 위해 자주 겟사마네에 갔습니다. 그 곳은 그가 이 전에도 자주 가던 곳이었습니다. 예수는 우리의 죄가 그에 대한 모든 것을 슬픔으로 바꾼 것을 우리가 보길 원했습니다. 그가 가장 즐겨 찾으셨던 장소가 고통 속으로 들어가는 장소가 된 것입니다.
아니면, 겟세마네는 예수가 많은 시간 기도한 곳이었기에 선택하셨을지도 모릅니다. 그 곳은 하나님께서 자주 예수의 기도에 응답하시던 곳이기도 해습니다. 그가 고난으로 들어갈 때, 그를 늘 도우셨던 하나님의 응답하심을 기억하는 것이 필요하다 느꼈을 겁니다.
아마도 겟세마네로 갔던 가장 큰 이유는 그 곳에 가는 것이 예수의 습관이었고, 또 그것을 모두가 알았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요한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그 곳은 가끔 예수께서 제자들과 모이시는 곳이므로 예수를 파는 유다도 그 곳을 알더라.” (요한복음 18:2). 예수는 사람들이 그를 체포할 것을 아시고 의도적으로 그 곳으로 가셨습니다. 그가 배신당할 때가 이르렀을 때, 그는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양처럼” (이사야 53:7) 가셨습니다. 그는 대제사장의 군사들을 피해 숨지 않았습니다. 그는 스파이에 의해 추적당하거나, 쫓겨다니는 도둑과 같이 될 필요가 없었습니다. 예수는 반역자가 그를 쉽게 찾고, 적들이 그를 체포하도록 기꺼이 그 곳으로 가셨습니다.
이제 겟세마네 동산으로 들어가봅시다. 얼마나 어둡고 끔찍한 밤이었을까요. 우리는 야곱과 같이 분명히 말할 수 있습니다, “두렵도다 이곳이여!” (창세기 28:17). 겟세마네를 묵상해보면, 우리는 예수의 고난을 생각하게 됩니다. 저는 겟세마네에서 예수의 슬픔에 대한 세 가지 질문에 대해 답을 해보려고 합니다.
I. 첫째, 겟세마네에서 예수의 고난과 고통의 원인은 무엇이었을까요?
성경은 예수가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 (이사야 53:3)라고 우리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는 절망적인 성품을 가진 자는 아니었습니다. 예수는 스스로 큰 평안을 갖고 있었기에 이렇게 말할 수 있었습니다,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요한복음 14:27). 저는 제가 예수를 평안하고 행복한 자라고 말한 것이 실수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겟세마네에서 모든 것이 변했습니다. 그의 평안은 떠났습니다. 그의 기쁨은 거친 슬픔으로 변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가파른 언덕길을 내려가, 기드론 시내를 건너고 겟세마네에 이르러 구세주께서는 기쁘게 기도하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요15-17)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제자들과 함께 기드론 시내 건너편으로 나가시니 그 곳에 동산이 있는데 제자들과 함께 들어가시니라” (요한복음 18:1).
예수는 일생동안 슬픔이나 절망에 대해 매우 드물게 말씀하셨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겟세마네 동산으로 들어가며, 모든 것이 변합니다. 그는 이렇게 울부짖습니다,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마태복음 26:39). 예수가 일생 슬픔과 절망에 대한 표현을 드물게 해왔었지만, 이제 이 곳에는 그의 한숨과 피가 된 땀이 있습니다, “내 마음이 매우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마태복음 26:38). 주님께서 깊이 괴로워하셔야 하는 무슨 문제가 있으신가요 주 예수님?
이 눈물과 고통은 그의 육체적 아픔에서 나온 것이 아니란 것은 확실합니다. 예수는 이 전에 육체적 문제로 인한 어떤 불평도 하지 않으셨었습니다. 그는 나사로가 죽었을 때, 슬퍼하셨었습니다. 적들이 그가 술고래라고 이야기 했을 때, 그들이 예수를 사탄의 능력으로 악마를 쫒아냈다고 고발했을 때, 예수는 의심할 여지없이 슬픔을 느꼈습니다. 하지만 그는 이 모든 것을 지나오며 담대해왔습니다. 이것은 그 배후에 있는 것입니다. 지금 예수를 붙잡고 그를 “고민하고 슬퍼하게” (마태목음 26:37) 만든, 고통보다 더 날카롭고, 비난보다 더 베어내는, 사별보다 더 끔찍한 무언가가 있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여러분은 이것이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나 십자가에 대한 두려움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많은 순교자들이 그들의 믿음 때문에 용감하게 죽어왔습니다. 예수가 그들보다 용감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 분의 명예를 훼손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주님은 그 분을 죽기까지 따랐던 순교자들보다 못한 것으로 생각되어져서는 안됩니다! 또한 성경도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히브리서 12:2). 예수보다 죽음의 고통을 잘 견딜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때문에 이것은 겟세마네에서 당한 예수의 고난에 대한 이유가 될 수 없습니다.
저는 또한 겟세마네에서의 고난이 사탄의 특별한 공격에 의한 것이었다는 것도 믿지 않습니다. 예수가 사역을 시작하실 때, 그는 광야에서 마귀와의 엄청난 충돌을 겪으셨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아직 예수가 광야에서 “고난 중에 있었다”는 표현은 보지 못합니다. 광야에서 있었던 유혹에는 겟세마네에서의 땀이 피가 된는 것과 같은 일은 없었습니다. 천사의 주되신 예수가 사탄과 대면하실 때에도, 그는 아버지께 소리내서 울부짖거나 우시지도, 땅에 엎드려 애원하시지도 않았습니다. 겟세마네에서의 고난과 비교하면, 사탄과의 갈등은 예수께 오히려 쉬웠습니다. 하지만 이 겟세마네의 고난은 그의 영혼을 상처입히고, 그를 거의 죽게 만들었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그의 고난을 일으켰을까요? 이제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예수를 고통 중에 두신 때입니다. 이제 예수가 아버지 하나님의 손으로부터 그 잔을 받아야만 합니다. 그는 이것이 무서웠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이 육체적인 고통보다 더 두려운 것이라는 것을 이제 여러분은 확실히 알 수 있는데, 예수님이 그것을 피하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이건 그에게 화나있는 사람들과 함께 하는 것보다 더 힘든 것이었습니다 – 하지만 그는 이것으로부터 돌아서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사탄의 유혹보다 더 무서운 것이었습니다 – 하지만 그는 이겨내셨습니다. 이것은 그의 아버지 하나님께로부터 온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끔찍하고, 엄청나게 경악스러운 일이었습니다.
이것은 무엇이 그의 고난을 일으켰는지에 대해 관심받고 있는 모든 의심들을 지웁니다: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이사야 53:6).
그는 이제 죄인들의 책임이었던 저주를 견디어내십니다. 그는 죄인의 자리에 서서 고통받으셨습니다. 이것이 제가 온전히 설명할 수 없는 그 고난의 비밀입니다. 그 어떤 인간의 마음도 이 고난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 오직 하나님께만
그의 슬픔이 온전히 알려져 있네
(“당신의 알려지지 않은 고난,” Joseph Hart, 1712-1768).
하나님의 양이 인간의 죄를 그의 몸에 지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죄의 무게가 그의 영혼에 놓였습니다.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베드로전서 2:24).
저는 우리 모두의 죄가 “예수의 몸에 지어져” 겟세마네에 있었고, 다음 날 그가 우리의 죄를 십자가에서 담당하셨다고 믿습니다.
겟세마네에서 예수는, 그가 죄를 짊어진 자가 되어야한다는 것을 온전히 깨달으셨습니다. 그는 희생양이 되어 그의 머리로 이스라엘의 죄를 담당하셨고, 속죄 제물이 되어 잡히셨습니다. 진영 밖으로 끌려가 하나님의 진노의 불에 완전히 소멸되셨습니다. 이제 왜 예수가 이것을 무서워했는지 아시겠나요? 하나님 앞에서 죄인 된 우리의 모습으로 선다는 것은 예수께 두려운 일이었습니다. 루터가 말했듯이, 마치 그가 하나님이 보시기에 세상의 모든 죄인들처럼 되는 것입니다. 그는 이제 하나님의 진노와 죄를 갚으시는 그 중심에 있게 되었습니다. 그는 죄인인 인간에게 떨어져야 할 그 심판을 스스로 견디십니다. 그 위치에 있는다는 것은 예수께 정말 끔찍한 일이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또한 이제 죄에 대한 형벌이 겟세마네에서 예수에게 떨어지기 시작해습니다. 첫째, 그 죄 자체가 예수께 입혀졌고 그 죄의 값이 주어졌습니다. 그것은 죄인인 인간을 위해 하나님의 정의가 치르신 결코 적지 않은 고난이었습니다. 저는 우리 주님이 견뎌내신 것을 과장하는 것에 대해 절대 두렵지 않습니다. 모든 지옥이 그가 마신 잔에 부어졌습니다.
구세주의 영에 부어진 화, 크고 깊이를 알 수 없는, 설명할 수 없는 고통의 바다, 즉 희생으로 죽으신 구세주의 혼에 끼얹어진 그 말로할 수 없는 고통은 너무 상상조차 할 수 없어서 제가 더 말하지 않겠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누군가가 저에게 설명할 수 없는 것을 표현하려 한다고 비난할 것입니다. 그러나 제가 이건 말하겠습니다. 그 거대하고 격렬한 인간의 죄 깊이에 대한 그 물보라가 그리스도 위에 뿌려졌고, 피가 된 땀으로 그리스도 위에 세례가 베풀어진 것입니다. 그는 결코 죄가 없음심에도 불구하고, 죄인으로 취급 받으시기 위해, 죄인으로서 벌받으시기 위한 것이 바로 오늘 본문에서 예수가 고난을 받으신 이유였던 것입니다.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더라” (누가복음 22:44).
이제 두번 째 질문으로 넘어갑시다.
II. 둘째, 예수의 피가된 땀은 무엇을 의미했을까요?
엘리콧은 피가 된 땀의 실상이 “일반적인 견해”라고 말합니다 (찰스 존 엘리콧, 성경 주석, 6권, 531쪽) 그는 이렇게 지적합니다, “’피가된 땀’이라는 용어는 아리스토텔레스에서는 극도로 고갈된 상태라는 의미로 기록되었다” (같은 책). 어거스틴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대부분의 주석가들은 “있는 그대로”라는 말을 문자 그대로 피를 나타냄을 주장해왔습니다. 우리는 또한 예수가 정말로 피를 땀으로 흘렸다고 믿습니다. 이것이 어쩌면 비상식적일지도 모르지만, 역사 속에서 여러 번 다른 사람들에 의해 증거되어 왔습니다. 갈레노스의 오래 된 의학책과 최근의 자료에, 오랫동안 약해져 있던 사람들이 피를 땀으로 흘린 기록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의 피를 땀으로 흘린 경우는 특별합니다. 그의 피는 땀으로 젖은 것 뿐 아니라, 큰 핏방울로 “응고”되어 떨어졌습니다. 이런 경우는 어디서도 나타난 적이 없습니다. 아픈 사람들에게 피가 땀처럼 젖어지는 경우는 있었지만, 핏방울이 되어 떨어진 경우는 없었습니다. 또 이 큰 핏방울은 그의 옷에 스며든 것이 아니라, “땅에 떨어졌습니다.” 이제 예수는 의학적 역사 속에서도 홀로 서 있습니다. 그는 건강했고, 서른 세살에 청년이었습니다. 하지만 그에게 주어진 죄의 짐에 대한 무게로부터 올라오는 정신적인 압박, 그의 모든 힘의 중압갑이 그의 몸을 비정상적으로 자극하여 그의 구멍들이 열리고 엄청난 핏방울들이 쏱아져 땅에 떨어졌습니다. 이것은 그에게 임했던 죄의 무게가 얼만큼이었는지 보여줍니다. 이것은 그의 피부에서 피가 흐를 때까지 그리스도를 짖눌렀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고난의 자발적인 본질을 설명합니다. 왜냐하면 칼없이 피가 자유롭게 흘렀기 때문입니다. 의사들은 대부분의 사람이 큰 싸움으로 크게 고통당할 때, 피가 심장으로 몰린다고 이야기합니다. 뺨은 창백해지고, 의식을 잃어가고, 피는 사라져갑니다. 하지만 고난 중에 계신 우리 구세주를 보십시오. 주님은 주님 자체를 매우 잊었기에 그의 피가 그의 몸 안에서 돌아 예수님의 몸에 영양분을 제공하는 대신, 밖으로 나와 땅에 떨어졌습니다. 그의 피를 땅에 쏟으심은 당신에게 자유롭게 주어지는 구원의 충만함을 보여줍니다. 피가 그의 피부에서 쏟아지고, 당신이 예수를 믿을 때, 당신은 죄로부터 씻음을 받을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더라” (누가복음 22:44).
피가 된 땀을 흘린 것은 예수의 영혼이 슬품 중에 있던 것의 결과였습니다. 마음의 고통이 가장 최악의 고통입니다. 슬픔과 낙담은 가장 어두운 통탄함입니다. 심한 우울증을 아는 사람은 이것이 사실임을 말할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에서 우리는 예수가 “고민하고 슬퍼하셨다”는 것을 읽었습니다 (마태복음 26:37). “고민하다” – 이 표현은 온전한 의미입니다. 이것은 다른 모든 생각들을 배제하고, 완전히 슬픔에 잠겨있는 마음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죄를 지고가는 자로서의 예수의 자리는 그의 마음을 다른 모든 것으로부터 가져가 버렸습니다. 그는 거대한 정신적인 문제의 바다에 이리저리로 던져졌습니다.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이사야 53:4). “그가 자기 영혼의 수고한 것을 보고 만족하게 여길 것이라” (이사야 53:4). 그의 마음은 그를 잃었습니다. 그는 공포와 실망으로 가득 찼습니다. 그는 “심히 고민했습니다”. 박식한 청교도인 토마스 굿윈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 단어는 영혼의 결함, 부족, 그리고 쇠약을 나타낸다. 예를 들어 아플 때나 기절할 때 나타나는 것과 같다.” 에바브라디도의 병, 그를 거의 죽게 만든 병, 과 같은 단어를 사용합니다.
우리는 예수의 영혼이 병들고 의식을 잃었던 것을 봅니다. 그의 땀은 극도의 지침에 의해 생긴 것이었습니다. 죽어가는 이들의 춥고, 축축한 땀은 그들의 몸의 약함 때문에 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피땀은 우리 죄의 무게로부터 온 그 혼의 내심의 죽음에서부터 온 것입니다. 그는 끔찍한 혼의 기절 상태였고, 그의 마음속은 죽음으로 고통당했으며, 그것은 그의 온 몸에서 나온 피의 눈물을 수반합니다. 그는 “심히 고민했습니다.”
마가복음은 우리에게 예수가 “크게 놀라셨다”고 이야기합니다 (마가복음 14:33). 그 헬라어의 뜻은 그의 놀람이 극도의 공포를 낳았고, 그것은 마치 사람의 머리카락이 서고 살결이 떨리는 것과 같습니다. 율법을 전달할 때 모세는 두려움에 떨어야했습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께서는 그의 앞에 놓여진 죄를 목도하시며 공포에 시달리셔야 했습니다.
우리 주님은 우선 슬픔을 느꼈고, 낙담하고 고민했고, 마지막으로 “엄청난 아픔”을 느꼈습니다. 그는 놀라움으로 가득찼습니다. 주님께서 실제적으로 우리 죄를 지셔야 했을 때, 그는 하나님 앞 죄인의 자리에 서셔서 깜짝 놀라셨고, 크게 놀라셨습니다. 주님은 하나님이 자신을 죄인의 대표로 보고 계시는 것에 대해서 놀라셨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버림받는 다는 생각에 놀라셨습니다. 그것은 그 분의 거룩하고, 부드럽고 사랑많은 본성을 휘청거리게 했고, 주님은 “심히 놀라시며” “슬퍼하셨습니다.”
우리는 여태껏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신 것을 들었습니다, “내 마음이 매우 고민하여 죽게되었으니” (마태복음 26:38). 헬라어 단어인 “perilupos”는 슬픔으로 둘런 싼다는 의미입니다. 일반적인 고통에는 벗어날 탈출구가 있습니다. 숨쉴 수 있는 희망의 공간이 있는 법입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문제가 있는 사람들에게 그들의 경우가 더 나쁠 수도 있다는 것을 상기시킬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경우, 상상이 되는 더 않좋은 경우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다윗을 통해 그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스올의 고통이 내게 이르므로” (시편 116:3). 하나님의 모든 파도와 물결이 그를 지나갔습니다. 그의 위로, 그의 밑으로, 그의 주변으로, 그의 밖에서, 그의 속에서, 모든 것이 고난이었고, 그의 고통과 눈물에서 빠져나갈 탈출구는 없었습니다. 어떤 슬픔도 예수의 것보다 멀리 갈 수 없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 영혼이 매우 슬프다.”, 죽음에 둘러싸여 “죽게 되었으니” – 죽음의 가장자리에 이른 것입니다.
그가 겟세마네 동산에서 죽으신 것은 아니지만, 그는 마치 죽을만큼 고통받으셨습니다. 그의 고통과 괴로움은 죽음의 가장자리까지 이르고나서야 멈췄습니다.
저는 엄청난 내면의 압박이 우리 구주를 핏방울을 흘리게 만들었다는 것에 놀라지 않습니다. 저는 이것을 인간의 관점에서 제가 할 수 있는 한 분명히 했습니다.
하나님께, 오직 하나님께만
그의 슬픔이 온전히 알려져 있네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더라” (누가복음 22:44).
III. 셋째, 왜 예수는 이 모든 것을 감당하셨을까요?
많은 사람들이 왜 예수가 이러한 고난과 핏방울을 흘리기까지의 고통을 당해야했는지 궁금해 할 것입니다. 그들은 아마도 이렇게 말할지도 모릅니다, “난 그가 그 모든 것을 이룬 것을 알지만, 왜 그래야만 했는지는 이해 못하겠어요.” 왜 예수가 겟세마네 동산에서 이 경험을 겪으셔야 했는지 다섯 가지 이유를 말하려고 합니다.
1. 첫째, 우리에게 그의 온전히 인간되심을 보여주시기 위함입니다. 그 분을 그저 하나님으로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 분은 분명히 신성한 분이시지만, 그가 당신과 같은 뼈와 살을 가진 가까운 친족으로 오셨다 느껴보십시오. 얼마나 그가 당신을 완전히 공감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는 당신의 모든 짐을 지시고, 당신의 모든 슬픔을 함께 슬퍼하셨습니다. 예수가 이해하지 못할 것은 당신에게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것이 그가 당신을 많은 유혹에서부터 옮기실 수 있는 이유입니다. 예수를 당신의 친구로 붙잡으십시오. 그가 당신에게 평안함을 주고, 당신을 삶의 많은 문제들로부터 옮기실 것입니다.
2. 둘째, 겟세마네에서의 그의 경험은 죄된 악을 보여줍니다. 예수는 결코 죄가 없으시지만, 당신은 죄인입니다. 오 죄인이여, 당신의 죄는 예수께 고통을 주었기 때문에 끔찍한 것임에 분명합니다. 우리의 죄의 전가로 인해 예수께서 피를 땀처럼 흘리셨습니다.
3. 셋째, 겟세마네에서의 고난의 시간은 우리를 향한 그의 사랑을 보여줍니다. 그는 우리의 자리에서 죄인으로 취급받는 끔찍함을 견뎌내셨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죄 값을 치루시고, 우리를 대신하여 모든 고통을 당하신 주님께 빚졌습니다. 우리를 그렇게 사랑하신 그 분을 우리도 사랑해야합니다.
4. 넷째, 겟세마네에 계신 예수를 보십시오. 그리고 그의 위대한 속죄함을 배우십시오. 하나님의 눈으로 보면, 제가 얼마나 검고 불결한지 모릅니다. 저는 제가 지옥에 던져지는 것이 맞다고 느낍니다. 하나님께서 얼마전에 저를 그 곳에 던지시는 것에 대해 놀랐습니다. 하지만 저는 겟세마네로 가서, 올리브나무 밑에 계신 저의 구세주를 봅니다.네, 저는 땅에 엎드려 울부짖고 있는 예수를 봅니다. 그 분의 신음소리를 듣습니다. 저는 그의 주변에 땅을 봅니다. 그 분의 피로 붉게 되어있고, 그의 얼굴은 고통스러운 땀으로 얼룩져있습니다. 저는 그 분께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 당신께 무슨 문제가 있는겁니까? 전 그 분의 대답을 듣습니다, “난 너의 죄 때문에 고난 당하는 중이란다.” 그리고 저는 예수의 희생을 통해 하나님이 저의 죄를 용서하실 수 있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예수께 나아와 그 분을 믿으십시오. 당신의 죄는 예수의 피로 용서받을 것입니다.
5. 다섯째, 예수의 속죄하는 보혈을 거부한 자들이 받게 될 벌의 공포를 생각하십시오. 생각해보십시오. 만약 당신이 그를 거절한다면, 당신은 언젠가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서서 죄에 대한 심판을 받아야만 합니다. 당신이 구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거절할 때 당신에게 일어나게 될 일을 말할 때마다 제 마음 속에 아픔이 있지만, 당신에게 말하겠습니다. 동산에서가 아니라, 침대에서 당신은 놀라고 죽음에 압도당할 것입니다. 당신이 죽고나면 당신의 영혼은 심판대로 옮겨지고 지옥으로 보내질 것입니다. 겟세마네가 당신에게 경고합니다. 이 신음소리와 눈물, 그리고 피가 된 땀이 당신을 회개케 하고 예수를 믿게 하길 바랍니다. 그 분께 나아오십시오. 그 분을 믿으십시오. 그 분은 죽음에서 일어나 지금도 살아계셔서 천국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계십니다. 더 늦기 전에, 지금 그 분께 나아와 용서받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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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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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전 Mr. Benjamin Kincaid Griffith의 독창가:
“당신의 알려지지 않은 고난” (Joseph Hart, 1712-1768).
설교요약 THE BLOODY SWEAT by Dr. R. L. Hymers, Jr.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더라” (누가복음 22:44). (요한복음 18:2; 이사야 53:7; 창세기 28:17) I. 첫째, 겟세마네에서 예수의 고난과 고통의 원인은 II. 둘째, 예수의 피가된 땀은 무엇을 의미했을까요? III. 셋째, 왜 예수는 이 모든 것을 감당하셨을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