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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흥의 대해 잘못된 여섯가지 현대적 이해 (SIX MODERN ERRORS ABOUT REVIVAL) by Dr. R. L. Hymers, Jr. 이 설교는 2009년 8월 22일 토요일 저녁, |
오늘은 서론부분을 삼가 하겠습니다. 우리는 성경를 펴서 많은 구절들을 읽을 것입니다. 오늘 설교 주제는 “부흥의 대해 잘못된 여섯가지 현대적 이해” 입니다.
저는 1961년도부터 이 부흥이란 주제에 관심을 쏟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첫대각성운동의 관한 조그만 책을 Biola 책방에서 구입했었습니다. 요한 웨슬리가 쓴 일지의 추론이었고, Moody Press서부터 출판된 책이었습니다. 저는 부흥의 대해서 심히 고민을 계속 해왔고, 48년이 넘게 기도를 해 왔었습니다. 침례교회 안에서 엄청난 두 부흥을 겪으게 된 것을 저한테는 큰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이 부흥은 복음주의적이나 오순절적 모임이 아니었습니다. 바로 기독교 역사책에서 볼 수 있는 부흥의 원형이었습니다.
이 주제대해 읽고 사고한 48년의 세월이 지난 후, 저는 제 자신을 부흥의 사람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저는 어린 초등학생처럼 느껴집니다, 부흥의 관해서 중요한 진리를 이제서 이해하기 시작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부흥에 관해서 잘못된 이해를 한 적이 과거에 있었습니다. 저는 몇년동안 Charles G. Finney의 글들을 통해서 그릇된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지금 이 순간도 제가 이 주제 대해서 완전히 이해한다는 확신이 없습니다,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것 같이 희미하나”
(고린도전서 13:13).
그러나 저는 여러분에게 부흥의 관한 여섯개의 잘못을 알려드릴 것입니다, 제가 잘못 믿었던 것들 대해서. 제가 바라는 것은 여러분이 하나님께 부흥을 위한 기도를 드리실때 이 요점들로 인해 도움을 얻는 것입니다.
I. 첫째로, 부흥을 일으키기 위해 사도적 은사에 중점을 두는 잘못.
제가 오순절주의자들을 증오하지는 않지만, 제 생각에 그들은 잘못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들이 사도적 은사에 중점을 두는 것이 진정한 부흥을 방해 한다고 생각합니다. Iain H. Murray가 말하기를,
이러한 은사들은 Chrysostom (c. 347-407) 과 Augustine (c. 354-430) 시대에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또한 종교개혁 부터 현재까지 일어난 어느 부흥이나… 부흥강사로부터 사로잡히지 않았습니다… 개혁자들은 오직 성경에 근거하였습니다. 그들은 사도적 진실은 추구했으나, 사도적 은사는 추구하지 않았습니다. 푸리탄들도 이와 같았습니다, Edwards 시대의 첫대각성운동에서도, Whitefield와 Wesleys, 그리고 스펄전 까지. 이 모든 분들이 Whitefield와 동의한 것은 “초대교회에 일어났던 기적의 은사들은 그 당시 옛날에 그쳤습니다”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리더들이 성령충만 했었으면, 위대한 일들을 행하기 위해서, 기적의 은사를 몰랐던 것이 참 이상하다고 봅니다… 온전히 새로워진 실재 주장의 특이한 현상은 35년전부터 형상되었던 것입니다 – 방언, 치유, 예언 그리고 “영안에 죽는것” – 부흥을 준비하는 것과 먼 거리가 되었으며 방해물이 된 것이 었습니다, 성령의 위대한 진리는 언제나 각성의 선구자 모습 이었습니다 (Iain H. Murray, Pentecost Today? – the Biblical Basis for Understanding Revival, Banner of Truth, 1998, pp. 197-199).
많은 사람들이 사도적 은사의 중점 때문에 성령의 생각과 부흥의 역사 대해서 멀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부끄러운 일입니다, 왜냐하면 성령님의 주된 역사는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6:8절을 통해 우리에게 알려주셨습니다,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성령님께서 이 역사를 오늘 날 우리 교회안에 절망적으로 역사 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그 다음, 다른 위대한 성령님의 역사 대해서 요한복음 15:26절에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내가 아버지께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 하실 것이요.”
성령님께서 책망하시는 역사가 우리 안에 일어나야 합니다. 성령님께서 그리스도를 우리안에 증거하셔야 합니다. 이러한 역사들을 하나님께서 우리 무리중에 일어나게 하셔야 합니다, 만약에 우리가 진정하고 역사적인 부흥을 원하고 있다면!
II. 둘째로, 오늘 날 부흥이 일어날 수 없다는 잘못.
저는 이 요점대해서 많은 시간을 보내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언급할게 있는데 바로 많은 사람들이 이 요점을 믿고 있다는 것입니다. 어떠한 사람들은 이러한 말을 합니다, “위대한 부흥의 날들은 끝났어. 우리는 마지막 시대에 살고 있어. 더이상 부흥의 역사는 없어.” 이러한 생각들은 성경의 중점을 더 많이 두는 기독교인들의 정상적인 사고 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생각들이 잘못 되었다는 세가지 이유를 말씀하겠습니다:
(1) 성경의 기록에서는,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 하고” (사도행전 2:39).
(2) 최고의 위대한 부흥은 대환란날에 일어날 것이며, 적 그리스도가 나타날 때, 이 시대의 마지막 때에 일어날 것입니다 (참조. 요한계시록 7:1-14).
(3) 온 역사중 제일 위대한 부흥은 동양에서 지금 일어나고 있습니다, 오늘 밤, 중화 인민 공화국에서, 그리고 동남아시아에 있는 다른 국가에서도. 현대시대의 위대한 부흥 역사는 지금 일어나고 있습니다!
오늘 날 부흥의 역사가 일어날 수가 없다는 생각은 아주 끔직한 사고 입니다!
III. 셋째로, 부흥의 역사가 우리의 복음적 노력에 달려 있다는 잘못.
이 요점은 남침례교인들중과 다른 이들의 공통된 잘못 입니다. 이 사상은 Charles G. Finney로부터 걸러낸 것입니다, 그가 언급하기를, “농작물을 얻기 위한 적절한 수단처럼 부흥이란 적절한 방법의 자연적인 결과이다” (C. G. Finney, Lectures on Revival, Revell, n.d., p. 5). 오늘 날 많은 교회들이 선전하는 것은 “부흥이” 어느 날에 시작하고 – 어느 날에 끝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순전한 Finney의 사상입니다! 부흥은 우리의 복음적이고 영혼을 얻기 위한 노력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사도행전 13:48-49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 주의 말씀이 그 지방에 두루 퍼지니라.”
제가 이 구절대해서 설명을 하기 전, 여러분들이 꼭 이해를 해셔야 할 것은 제가 칼빈주의에 다섯점을 다 품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느 사람들은 제가 “적당한 개혁자”라고 부릅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이러한 말을 하는 것은 저의 관점을 알으시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제가 이 구절을 볼 때에, 제가 억지로 수용하는 것은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인 것입니다. 아무리 말씀이 “지방에 두루 퍼질”찌라도 오직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게” 되는 것입니다.
부흥이 우리의 복음적인 노력에 달려있다는 생각을 이 두 말씀구절이 명백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마가복음 16:15) – 그러나 모든 피조물들이 믿지는 않을 것입니다! 부흥의 때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다른 때보다 믿게 될 것입니다 – 하지만 명백하게 분명한 것은 우리의 복음적 노력이 부흥 역사에 달려있지 않은 것입니다.
부흥의 관해서는 신비가 있습니다 – 그 이유는 회심과 부흥은 인간의 이성밖에 있습니다. 믿던 믿지 않던 우리는 복음을 전파하라고 명령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부흥은 하나님께 달린 것입니다, 우리의 복음적인 노력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IV. 넷째로, 부흥의 역사가 기독교인들의 헌신에 달려 있다는 잘못.
어느분은 역대하 7:14절을 인용할 것을 저는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신약성경 의 말씀 구절을 인용하지 않는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과 올바르게” 관계해야 부흥의 역사가 일어난다는 이론을 거론하지 않는 것이 더 이상합니다. 왜 솔로몬 왕에게 언급되었던 이 말씀 구절이 신약시대의 교회에서 부흥의 공식으로 사용되어야 합니까? 설교자가 그의 교회로부터 배를 보내어, “금과 은과 상아와 잔나비와 공작을” 실어오는 것 밖에 이유가 되는 것을 봅니다, 솔로몬이 역대하 9:21절에서 한 것처럼, 두 장 후에!
Iain H. Murray가 말하기를, 역대하 7:14절에 관하여는, “첫번째로 언급 할수가 있는 것은 확실히 여기서 약속된 것은 [신약시대] 부흥의 관한 것이 아닙니다, 약속은 이해가 되어야 하며, 첫 사례부터, 약속이 맺어진 시간의 관계부터 입니다. 이 약속은 구약시대의 이스라엘과 그 땅에 대해서인데 치유를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Murray, ibid., p. 13).
부흥의 역사가 그리스도인들의 헌신에 의하여 일어난다는 사상은 Finney로부터 온 것입니다. Jonathan Goforth는 Finney보다 더 낳은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Finney의 가르침을 반향하였습니다, “단호함의 죄는, 스스로, 우리를 부흥에 참여하지 않게 만듭니다… 오순절은 아직 우리의 범위에 있지 않습니다. 만약에 부흥의 역사가 우리로부터 일어나지 않는다면 그 이유는 우리안에 아직 우상이 자리를 잡고 있는 것입니다” (Jonathan Goforth, By My Spirit, 3rd edition, Marshall, Morgan and Scott, n.d., pp. 181, 189).
Winston Churchill는 한번 본인의 손자에게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역사를 공부하라면서, 그 이유는 역사속에 미래를 위한 지혜스러운 추측이 있다는 것입니다. Churchill의 명언을 따라서, “역사를 공부하세요,”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것은 부흥의 역사는 그리스도인들의 “온전한 헌신”에 의하여 일어나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요나 선지자는 하나님께 온전히 헌신하지 않았습니다. 요나서의 마지막 장을 읽어보세요, 그러면 여러분이 요나의 단점과 믿음이 모자라는 모습을 볼수 있게 될 것입니다. 구약시대 때 이방인들 사이에 일어났던 위대한 부흥의 역사는 선지자들의 “완벽함”이나 “절대적 포기”의 의존하지 않았습니다. John Calvin도 완벽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한 사람이 이단성 빠져서 화형에 처벌 했었습니다 – 신약시대의 태도를 강하게 보여준 것입니다! 그래도 하나님께서는 죤 칼빈 사역에 위대한 부흥을 일으키셨습니다, 그리고 그의 글을 통해서도 엄청난 부흥을 일으키셨습니다. 루터는 가끔 지독한 성질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한번은 유대인들의 회당들을 불질러 버려야 한다고 주장했었습니다. 가끔식 루터의 지독함과 유대인들을 증오하는 죄가 있어도, 하나님께서는 루터의 사역을 통해 큰 부흥을 일으키셨습니다. 우리가 칼빈과 루터를 용서할 수 있는 것은 그들이 중세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카톨릭의 영항을 받았기 때문이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단점이 많았어도, 하나님께서는 위대한 개혁 부흥을 이들의 사역을 통해 일으키셨습니다. Whitefield는 가끔식 “내적느낌”때문에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셨다는 착각을 한 까닦이지요. Wesley는 주사위를 던져 하나님의 뜻을 구별하기도 했었습니다. 스펄젼은 가끔식 시가 (cigar) 를 피우기도 했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사람들이 담배를 피우는게 악한것이라고 생각을 하지 않았었습니다. The Victorians들은 우리가 진한 커피 한잔을 마시는 것보다 더 낳은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J. Frank Norris는 가끔식 비열하게 영적으로 굴었습니다. 우리가 그를 용서할수 있는 것은 얼마나 그가 큰 압력을 당하고 있었습니까, 독자적인 침례교 운동을 시작하면서, 바로 이 분이. 그럼에도 불구하고Whitefield, Wesley, Spurgeon, Luther, Calvin 과 Norris는 자신들의 사역을 통해 위대한 부흥을 참여하게된 것입니다.
역사안에서 이러한 예를 볼 때에, 불완전한 인간이, 거룩하거나 헌신적이지 아니어도, 하나님으로부터 부흥을 위해 위대하게 쓰임을 받았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온전하게 헌신을 함으로서 부흥이 일으킬 수 있다는 Finney나 그의 모방자들의 발언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우리가 솔직하게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사도바울이 우리에게 말씀하기를,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고린도후서 4:7).
여러분 보세요, 부흥이란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을 드리는 것에 달려있지 않습니다, 자신들을 온전히 희생하는 것에 달려있지 않는 것입니다. 맏습니다 – 부흥은 “능력의 심히…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고린도후서 4:7).
역대하 7:14절을 인용하여, 최근 Bill Bright이 가리키기를 그리스도인들이 스스로 회개하고 금식하고 헌신하는 것이 부흥을 일으킬것이라고. 하지만 Mr. Bright는 틀렸습니다, 많은 방면에서 좋은 사람이었을 찌라도. 그는 무의식중에서 Finney의 사상을 추구하고 있었으며 바로 인간이 부흥을 온전한 헌신을 통해 일으킬 수 있다는 사상이었습니다. 그러나, 슬프게도, Mr. Bright 노력의 댓가로 서구에서는 부흥이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이유는 부흥이 그리스도인들의 헌신에 의하여 일어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직 “능력의 심히…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고린도후서 4:7).
저는 스데반 집사의 설교를 인용하면서 이 요점을 마무리하고자 합니다. 우리에게 명확히 알려진 스데반 집사는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여 큰 기사와 표적을 민간에 행하니” (사도행전 6:8). 그러나 스데반 집사는 그분의 설교를 통하여 부흥의 역사를 보지 못했습니다. 반대로, 그는 돌을 맞으면서 죽었습니다. 그는 거룩하고 의로운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성품들이 자동적으로 그의 사역을 통해 부흥을 일이키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금식하고 기도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억지로 하나님께서 부흥을 보내시지는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도바울께서 이 질문의 대한 답문을 하셨습니다,
“그런즉 심는 이나 물주는 이는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나게 하시는 하나님 뿐이니라” (고린도전서 3:7).
모든 부흥의 영광은 하나님께 돌려야 합니다 – 그리고 그 어떠한 영광도 인간이 취하면 안됩니다, 아무리 의롭고 거룩한 사람일찌라도! 그래서, 여러분이 만약에 깊은 회개와 충심의 헌신을 하실찌라도 자동적인 부흥이 일어날 것이라는 생각을 반드시 하시면 안됩니다. 이것은 Finney로부 온 그릇된 사고입니다. 제가 의미하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께 충성과 헌신을 하지 말라는 소리가 아닙니다. 당연히 하셔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여기서 기억해야 할 것은 우리는 마술을 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희생하면서 헌신을 한다고 해서 하나님으로부터 부흥을 강조할 수 없습니다. 요 근래에 누가 쓴 글을 읽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온전한 헌신을 통해 진정하게 기도하면 부흥은 일어날 것이다.” 이 언급은 “마술”처럼 들립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조종하여 부흥을 일으키시라고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겸손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얼마나 “진정한” 기도를 드릴찌라도, 그리고 우리가 얼마나 “온전한” 헌신을 드릴찌라도, 부흥을 일으키느냐 마느냐 대해서는 하나님의 최종 선택입니다. 오직 하나님께 달려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없습니다! 네, 우리는 지속적으로 부흥을 위해 기도를 해야 합니다, 동시에, 언제나 기억해야 하는 것은 “오직 자라나게 하시는 하나님 뿐이니라” (고린도전서 3:7). 오직 하나님 주권의 능력으로만 진정한 부흥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V. 다섯째, 부흥의 역사가 교회의 일상 상태로서 우리가 기대를 해야 하는 잘못.
오순절 날 성령님께서는 사도들에게 임하셨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언어로 사람들에게 말씀을 선포했었습니다, 그리고 이 위대한 부흥의 역사에서 삼천명이 회개를 하게 되었습니다, 사도행전에서 기록된 것처럼, 두번째 장에서. 그러나 이들이 다시 성령충만을 받아야 하는 필요성이 있었습니다, 사도행전 4:31절에 기록한 것처럼,
“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 (사도행전 4:31).
여기서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바로 초대교회 때 부흥의 시기가 시작되었던 것이었습니다, 비범한 부흥의 때. 하지만 어느때에는 교회안에서 역사가 일상시에도 일어 났었습니다, 매일 부흥집회가 있었습니다. 그래서인지 사도바울께서 이러한 말씀을 하신것 같습니다,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디모데후서 4:2). 그래서 우리는 계속 말씀을 증거하고 기도하여 부흥이 있던 없던 예수님의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부르셔서 지상명령에 순종하라고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8:19-20), 그리고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마가복음 16:15), 부흥이 있거나 없거나! 하나님의 보기 드문 움직임이 없어도 어떤이들은 회심을 하게 될 것입니다.
만약 부훙이 평상시의 하나님 역사적인 방법이라고 우리가 생각하면, 우리는 낙심하게 될 것입니다. Ian H. Murray 가 말하기를,
이 요점대해서 George Whitefield가 본인 친구 William McCulloch에게 주의를 주게 되었습니다, Cambuslang [스코틀랜드] 의 목사님이었지요. 1749년 McCulloch는 낙심하게 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1742년때 일어났던 부흥운동의 모습을 보았지만 당시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Whitefield가 그에게 대답한 것은 1742년도의 일어났던 부흥은 교회의 정상적인 역사가 아니었다는 것을: “Cambuslang에 [또] 다른 부흥이 일어난다는 소식을 들으면 저도 기뻐할 것입니다; 하지만, 선생님, 백년에 한번 나올까 말까 하는 부흥을 미리 보셨습니다.” Martyn Lloyd-Jones는 비슷한 상황을 언급했습니다, Welsh의 목사에 “온 사역이 망한” 케이스 입니다, 1904년때 일어났던 부흥의 역사를 체험하게 되어 계속 과거를 기억하던 케이스지요: “부흥의 역사가 끝났을 때… 그는 아직도 흔한 일을 바라고 있었다; 그리고 역사하지도 않았다. 그래서 그는 우울해졌고 사십년이란 그의 삶을 무력하게, 불행하게, 쓸모없이 지냈었다” (Iain H. Murray, ibid., p. 29).
만약 하나님께서 부흥의 역사를 일으키시지 않으시면, 우리는 낙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계속 전진해야 합니다,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복음을 선포하면서, 그리고 죄인들을 한 사람식 그리스도께 인도해야 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하나님께 특별한 부흥의 때를 보내주시라고 지속적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만약에 부흥이 일어나면, 우리는 누릴 것입니다. 만약에 안 일어나면, 우리는 계속 영혼들을 한명 식 그리스도께 인도할 것입니다! 우리는 낙심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포기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때를 얻던 못 얻던 준비할 것입니다!
VI. 여섯째, 부흥과 관련된 어떠한 것들도 조건이 없다는 잘못.
성경과 역사가 같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바로 부흥이 인간의 복음적 노력이나 그리스도인들의 온전한 헌신에 달려있지 않다는 점. 그러나 몇 조건들이 맞아야 합니다. 이 조건들은 옳은 교리이며, 기도입니다. 우리는 반드시 부흥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죄와 구원대해서 올바를 교리를 알아야 합니다.
이 책에서는, Revival (Crossway Books, 1992), Dr. Martyn Lloyd-Jones께서 두개의 장을 쓰셨습니다, 제목은 “Doctrinal Impurity” (교리의 불결)와 “Dead Orthodoxy” (죽은 정통) 입니다. 이 두개의 장에서 저자는, 젊었을 때 위대한 부흥을 체험함으로서, 우리에게 언급을 하는데 바로 하나님께서 일으키시는 부흥을 기대하려면 몇 교리들이 선포되어야 하며 믿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섯 교리 중 여러분에게 네 가지를 소개합니다.
1. 인류의 타락과 완전한 부페 – 완전한 부폐.
2. 중생 – 아니면 신생 – 하나님의 역사임, 인간의 어떠함이 아님.
3.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고 인정받음 – “결정”에 의한 믿음이 아님.
4. 죄를 씻기는 그리스도 보혈의 효력 – 원 죄와 개인의 죄.
이 네가지의 교리들이 Charles G. Finney로부터 공격을 당했었습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격하되고 부정되었습니다. 우리가 1859년부터 부흥의 역사를 보지 못한것이 당연합니다! 저는 세미하게 설명을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이 교리들은 극히 중대합니다, 교회에 부흥을 소망하시면 한번 더 이 교리들이 선포되어야 합니다. 현대 교회에는 방황하는 사람들로 꽉 채워져 있습니다, 우리가 활기있고 강력하게 이 주제들을 선포하기 전 까지는 이 사람들은 진정하게 평생 회심하지 않을 것입니다 – 그리고 반복적으로!
Dr. Lloyd-Jones 가 말하기를,
부흥의 관한 역사를 보세요, 그러시면 남자나 여자들이 절망적인 상태인 것을 발견하실 것입니다. 이들은 알고 있었습니다, 자신들이 의로운것보다 더러운 헝겊이란 것을, 그리고 이들의 의로움이 아무 가치가 없다는 것을. 그리고 거기에 있었습니다, 아무것도 못 한다는 것을 느끼면서, 하나님께 용서와 긍휼을 빌면서. 믿음으로 의인이 되는 것. 하나님의 행위입니다. “만약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역사 하시지 않으시면,” 이들이 말하기를, “그러면 우리는 멸망한다.” 그리고 이들은 [자신들의] 철저한 무력함을 하나님 앞에서 느낄것입니다. 주의를 기울이지 않을 것입니다, 아무런 의미도 중시하지 않을 것입니다, 자신들이 과거에 형성한 종교성에, 또한 자신들이 교회를 출석한 신실함에, 그리고 많은, 수많은 다른 것들에. 아무것도 의로운게 없다는 것을 봅니다, 자신들의 종교도 가치가 없다는 것을, 아무것도 가치가 없다는 것을.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의롭게 하셔야 합니다. 바로 이러한 메시지가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모든 부흥의 역사 때 (Martyn Lloyd-Jones, ibid., pp. 55-56).
“일을 아니할찌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로마서 4:5).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로마서 3:24-25).
이것들이 부흥의 교리입니다! 회심을 얻게하는 교리들이 이 요소 들입니다! 우리는 반드시 죄의 확신을 봐야 합니다, 깊게, 마음이 울리는 확신. 영혼들이 자신들의 죄 때문에 예수께 부르짖는 모습을 우리는 봐야 합니다, 구원을 얻기위해, “그분의 보혈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설교 끝)
여러분은 Dr. Hymers의 설교를 매주 인터넷 www.realconversion.com 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Sermon Manuscripts” 에 클릭 하시기 바랍니다.
설교 요약 부흥의 대해 잘못된 여섯가지 현대적 이해 (SIX MODERN ERRORS ABOUT REVIVAL) by Dr. R. L. Hymers, Jr. (고린도전서 13:12) I. 첫째로, 부흥을 일으키기 위해 사도적 은사에 중점을 두는 잘못, 요한복음 16:8; 15:26. II. 둘째로, 오늘 날 부흥이 일어날 수 없다는 잘못, 사도행전 2:39; 요한계시록 7:1-14. III. 셋째로, 부흥의 역사가 우리의 복음적 노력에 달려 있다는 잘못, 사도행전 13:48-49; 마가복음 16:15. IV. 넷째로, 부흥의 역사가 기독교인들의 헌신에 달려 있다는 잘못, 역대하 9:21; 고린도후서 4:7; 고린도전서 3:7. V. 다섯째, 부흥의 역사가 교회의 일상 상태로서 우리가 기대를 해야 하는 잘못, 사도행전 4:31; 디모데후서 4:2. VI. 여섯째, 부흥과 관련된 어떠한 것들도 조건이 없다는 잘못, 로마서 4:5; 3:24-25. |